본문 바로가기

저識/역사

조선왕조 '군(君)'에 대해

조선 왕들의 묘호를 보면 대부분이 이 붙습니다.

 

()’나라를 건국했거나, 큰 국난을 극복했을 때, 국가의 정통을 다시 세운 왕에게,

그 외에 왕에게는 나라를 잘 유지했다는 의미()’을 사용합니다.

 

조선의 왕 27명 중 7명의 왕이 를 사용하고 18명의 왕이 을 사용합니다.

 

그럼 2명의 왕은 어떤 묘호를 사용할까요?.

 

2명의 왕은 ()’의 묘호를 사용하는데요.

()’의 묘호를 쓰는 왕은 모두들 잘 알고 있듯이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둘만 특별하게 ()’의 묘호를 사용할까요?

 

조선왕조 군에 대해
조선왕조 군에 대해서

그 이유는 왕위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왕이 노쇠하여 병들거나 승하했을 때,

또는 왕이 자의적으로 왕위를 물려줄 때입니다.

 

대부분이 죽으면서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요.

*조선 2대왕인 정종처럼 스스로 왕위를 물려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아닌, 타의로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왕들은 ()’의 묘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각각 '중종반정', '인조반정'으로 인해 왕위에서 물러나며 의 묘호를 받았습니다.

 

연산군

연산군 광해군
연산군일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연산군(燕山君)’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를 일으킨 왕으로, 여러 기행과 만행을 부려 망나니 왕으로 기억되곤 합니다.

 

연산군의 기행은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성종의 후궁인 엄씨의 모함으로 인해 궁에서 내쫓기고 사사(賜死)된 것을 알게 되며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어머니를 폐위를 방관한 관리와 후궁들을 괴롭히는 걸로 시작해, 점점 심해진 광기(狂氣)후궁을 죽이고, 관리 수십명을 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뿐 아니라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가 올라오자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을 폐지했으며,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성균관에서 기생들을 불러 놀 시작합니다.

*흥청망청이란 말이 이때 생겨났다곤 하죠.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자신의 조모인 '인수대비(仁粹大妃)' 를 구타하여 죽게 만든 것인데요. 

연산군의 이런 만행이 계속되자 훈구파는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키는데요.

이것이 1506년 발생한 중종반정입니다.

이로인해 연산군은 왕위에서 물러나며 폐왕이 되어 연산군으로 강등되게 됩니다.

광해군

연산군과 광해군
광해군 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선조의 아들 광해군(光海君)’은 임진왜란을 온 몸으로 겪은 왕입니다.

 

'선조(宣祖)'가 우리에게 무능한 왕으로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임진왜란 때문인데요.

 

'선조'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가게됩니다.

 

그러면서 당시 미뤄뒀던 세자 책봉을 떠나는 길에 자신의 둘째아들인 '이혼()'에게 급하게 합니다.

 

'이혼()'은 세자가 된 이후 선조로부터 '분조(分朝)'의 책임자로 임명되게 됩니다. 

 

이  '분조(分朝)'의 책임자가 된 '이혼()'이 바로 조선 15대 왕 광해군(光海君)’ 입니다. 

 

이때의 '분조(分朝)'광해군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분조'의 책임자가 된 광해군은 의주로 피난을 가있는 선조를 대신해 전장을 누비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광해군의 노력과, 모든 백성들의 노력으로 인해 조선은 왜란을 극복하게 되는데요.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에 일어납니다.

 

 

 

 

 

 

광해군이 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 동안 의주로 피난 가 있던 '선조' 백성들의 질타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광해군을 아니꼽게 보게 되죠.

 

그것을 바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영창대군(永昌大君) 세자 책봉 문제입니다.

선조는 전후(戰後)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난 어린 왕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합니다.

 

이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 한 상태인데도 말이죠.

 

이를 알게 된 대신들이 이에 반대하자 선조는 그들을 유배시키기 까지 합니다.

 

하지만 선조는 영창대군의 세자책봉을 끝마치지 못하고 승하하게 되고,

임진왜란 때 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이 다음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광해군'은 즉위하면서 자신을 도왔던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자신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서인으로 강등시키고 강화도로 유배 보내, 죽게 만들었습니.

 

또한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계비임 인목대비를 유폐시켰죠.

 

이런 일들 때문에 광해군에겐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이는 서인들에게 '인조반정'의 명분을 만들어줬습니다.

폐모살제(廢母殺弟)’ - 어머니를 죽이고 형제를 죽였다.

 

결국 광해군은 1623 '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어 '광해군'으로 강등되었습니다.

노산군

우리가 잘 알고있는 '광해군'과 '연산군' 외에도 한 명의 '군'이 더 있는데요. 

바로 '관상'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조선의 6대 왕인 단종(端宗)’입니다.

단종 노산군
단종 영정사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단종어린 나이에 왕위 되었고, 어린나이에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폭군'이라는 이미지와는 멀어 단종에게 ()’이라는 묘호가 붙었다는 것은 생소한데요.

 

위에서 말 했듯이 ()’이 묘호에 붙는 경우는 왕위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을 때입니다.

 

단종 또한 왕위를 정상적으로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의 묘호를 받았었는데요. 

 

이것은  연산군', '광해군'과는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연산군'과 '광해군' 반정(反正)’으로 인해 왕위에서 억지로 물러나게 된 것이라면,

 

단종은 오히려 조선 2대왕 정종(定宗)’처럼 왕위를 스스로 물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종이 바라던 일이 아니었죠.

 

단종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왕위를 물려준 인물은 바로 자신의 숙부이자 후에 '세조(世祖)'가 되는 수양대군(首陽大君)’입니다.

수양대군은 단종의 숙부 즉 작은아버지입니다. 5대왕 '문종(文宗)'의 동생이죠.

 

병약했던 '문종'이 이른 나이에 승하하자, 어린 나이였던 단종이 왕위에 앉게 됩니다.

자신의 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앉게 되자 수양대군은 왕위를 노리게 되는데요.

 

1453 수양대군은 자신의 군사를 몰고 좌의정 김종서를 비롯한 신하들을 죽이고,

자신이 직접 영의정에 자리에 올라 정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비록 왕은 단종이었지만 실권을 잡고 있는 것은 수양대군이었고, 이런 상황과 주변 정세에 시달리던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있었는데요.

 

그 유명한 '육신(生六臣)' '사육신(死六臣)'입니다.

 

이들은 1456 단종복위운동을 일으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하지만 '세조에게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죠.

 

이때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은 처형당했고,

 김시습, 원호, 이맹전 관직에서 떠나, 이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게 됩니다.

 

 

 

 

 

 

 

'세조는 이 단종복위운동이 또 다시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듬해 단종강원도 영월로 유배시키며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킵니다.

 

이후 또 다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며 '세조는 단종을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결국 단종강원도 영월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종이란 묘호는 시간이 지난 후에 붙여지는데요.

 

19대 왕인 숙종이 1698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으로 복위시켰습니다.

당시 신하들이 이루지 못했던 단종복위를 숙종 때가 되어서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신하들이 단종복위운동을 일으킨 것은 왕위 찬탈에 대한 반발로만 볼 수 없는데요.

말하자면 단종혈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단종조선 왕조의 마지막 엘리트 혈통이었습니다.

 

조선 초기 왕의 계보는 태조 - 태종 - 세조 - 문종 - 단종으로 이어집니다.

 태조와 태종 사이에 정종이 껴있긴 하지만 생략했습니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왕위계승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이상적인 세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 때문에 이런 이상적 세습이 끊기게 되죠.

 

조선은 묘호를 ()’에서 ()’로 바꾸면서 까지 정통성을 중요시 했습니다.

 

그런데 '세조가 단종왕위를 찬탈하면서 이런 정통성이 흔들려버린 것입니다.

 

'세조‘6조 직계제’, ‘집현전 폐지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자신의 조카를 쫓아내면서 왕권을 약화시킨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또한 이후에 단종만큼의 정통성을 가진 왕이 나오지 않아 '세조더 큰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세조와 단종에 관한 이야기가 야사에 나오는데요,

 

'세조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나왔습니다.

 현덕왕후는 '세조에게 화를 내며 '세조에게 침을 뱉었는데,그 이후에 '세조의 몸에 부스럼과 종기가 많이 나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세조는 이 부스럼과 종기 때문에 죽게 되죠.

 또한 현덕왕후의 저주인지 '세조의 아들들은 다 이른 나이에 죽고 말았죠.

 

여기까지 조선왕조 3명의 ()’에 알아봤습니다.

 

평소 우리가 잘 알고 있던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말고도

 

노산군(魯山君)’이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다행이도 노산군단종으로 복위되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광해군도 임진왜란 때의 노력과 잘한 점이 

 

당시 정치적 이념에 의해 묻혀버린 것 같아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조선 왕 전하와 저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최초의 한글소설은 무엇일까?

개똥이라 불리던 왕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왕이 된 농부

<날개>의 작가 이상(李箱)은 사실 이상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글에 오류가 있거나 오타가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